셰몬 비치코프(가운데 단상 위)가 이끄는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체코의 독립기념일인 10월 28일 내한했다. 예술의전당에서 체코 국민곡으로 불리는 스메타나 ‘나의 조국’ 전곡 6악장을 한국 관객에게 선사했다. 이민경 기자


스메타나 ‘나의 조국’, 아니 보다 정확하게 2악장 ‘블타바’(몰다우)의 팬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이런 광경이 벌어진다. 지휘자 셰몬 비치코프가 지휘봉으로 블타바강이 굽이치는 소리를 창조할 때, 객석에서도 너나할것 없이 ‘머리 지휘’가 이어졌다. 체코의 독립기념일인 10월 28일에 체코 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애국가’와도 같은 ‘나의 조국’을 듣는 기쁨이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물들였다.
총 6악장으로 이뤄진 ‘나의 조국’은 인터미션 없이 90분여간 이어졌다. 연주가 끝나고 비치코프는 얼굴전체에 흐르는 땀을 닦느라 꽤 오랜시간 관객을 등지고 있었다. 의외의 ‘밀당’ 끝에 비치코프가 드디어 관객을 마주하자 박수 소리가 더 거세어졌다. 현장에서 전해진 느낌은, 이것은 단지 체코필의 연주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 관객들이 ‘블타바’를 ‘직접 내 귀로 들었다’는데서 오는 희열로 인한 듯했다.
2악장 ‘블타바’의 시작은 두 대의 플루트가 시작하는 작디 작은 여린 소리. 스메타나가 표현하고자 했던 ‘작은 샘물’이었다. 그리고 바이올린과 클라리넷, 하프가 부드러운 소리를 더하면서 ‘시냇물’이 되어 흐른다. 강물은 들판과 숲, 비옥한 동부 유럽의 평야를 굽이굽이 흐른다.



체코 프라하 경관


체코필 단원들도 강의 움직임처럼 흔들거렸다. 바이올린 활의 보잉은 격정적이었고, 클라리넷, 바순 등 관악기 연주자들은 악기에 혼을 불어넣는 것처럼 집중한 모습이었다. 밤이 되자 강물에 비친 달이 윤슬을 만들어낸다. 갑자기 물길이 빨라지며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기도 한다. 강의 움직임이 소리로 그려지는 환상적 경험이었다. 마침내 큰 강 블타바는 비셰흐라드(체코 프라하에 위치한 요새)에 이르고, 오케스트라도 주제 선율의 클라이막스에 도달한다.
옛 보헤미아 땅을 여행하는 것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3악장 ‘샤르카’로 진입한다. 3악장은 전곡 중 유일하게 자연이나 지형지물이 아닌 순수한 신화를 다룬다. 여자들의 군대를 이끄는 샤르카가 사랑을 배신한 연인에 대한 원한으로 이 세상 모든 남자들에 대한 복수를 맹세한다. 여전사처럼 정열적인 선율이 매혹적이었다.



90분간 인터미션없이 전곡을 완주하고 난 뒤 지휘자 비치코프(가운데)가 악장과 악수하고 있다. 이민경 기자


4악장, 그리고 연곡인 5악장과 6악장에 들어가기 전, 비치코프와 체코필 단원들은 다시 음정을 조율하는 재정비의 시간을 짧게 가졌다. 체력을 비축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5악장 ‘타보르’와 ‘블라니크’는 일종의 연작인데, 전쟁에 나서는 전사들의 출정처럼 힘차고 결의에 차있다. 나치 독일이 체코를 점령했을 때 이 두 악장의 연주를 금지했을 정도로 민족주의적 메시지가 강하다는 해석도 있다. 체코의 국민곡은 어쩌면 이런 지점에서 한국인의 정서 ‘한’과 맞닿아 있을 수도 있겠다는 감상이 더해진다.
어쩌면 2악장 ‘블타바’를 다시 들려줄까, 이어지는 커튼콜 내내 관객들은 박수 소리의 데시벨을 줄이지 않았다. 하지만 비치코프와 체코필은 깊숙히 절하며 앙코르 없이 퇴장했다. 어쩔수 없이 관객 스스로 선율을 허밍할 뿐이었다.
이민경 기자